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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책&읽을책

데미안의 에밀 싱클레어, 『황야의 이리』의 하리 할러

by leeebook 2023. 1. 17.

『황야의 이리』, 헤르만 헤세 지음, 이인웅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청소년 시절 필독도서라던 <<데미안>>을 무턱대고 읽고,
아 그래, 헤르만 헤세는 재미없는 작가구나,
이렇게만 생각하고 한쪽으로 치운 독자가 나만은 아닐 것.

『황야의 이리』는 바로 그 헤르만 헤세(H. H)의 소설로, 하리 할러(H. H)라는 자칭 '황야의 이리'의 수기 형태를 띤다.
H. H - 여러모로 헤르만 헤세를 연상케 하는 하리 할러를 통해 예술가의 내면, 나아가 인간의 내면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심지어 데미안을 다시 읽고 싶어지게까지 하는(!) 작품이다.
대개 <<데미안>> 등등 헤르만 헤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여기에도 역시 있다.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할 때 잡으면 좋다.

 

황야의 이리는 두 가지 본성, 즉 인간과 이리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것이 그의 운명이었다.
하리와 비슷한 성격을 지닌 사람들이 상당히 많으며, 특히 많은 예술가들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는 점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자기 내면에 두 개의 영혼, 두 개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 하리의 내면에 이리와 인간이 존재하듯이 그들 속에도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 모성적인 피와 부성적인 피, 행복의 가능성과 고통의 가능성이 적대적이고 뒤헝클어진 채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하리와 비슷한 성격을 지닌 사람들이 상당히 많으며, 특히 많은 예술가들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는 점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자기 내면에 두 개의 영혼, 두 개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 하리의 내면에 이리와 인간이 존재하듯이 그들 속에도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 모성적인 피와 부성적인 피, 행복의 가능성과 고통의 가능성이 적대적이고 뒤헝클어진 채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시민은 극단들 사이의 중간 지대, 즉 격렬한 폭풍이나 뇌우가 없는 적정하게 쾌적한 지대에 안주하려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은 성취되고 있다. 이때의 성취는 절대적인 것과 극단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이 부여해 주는 강렬한 인생과 감정을 대가로 치르고 나서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강렬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자아를 희생해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시민은 자아를( 물론 그것도 발육부전의 자아를)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 그래서 강렬한 삶을 희생한 대가로 보존과 안정을 얻고, 신들린 상태 대신에 양심의 안정을, 쾌락 대신에 쾌적함을, 자유 대신 편안함을, 그리고 살인적 작열 대신 기분 좋은 온도를 얻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황야의 이리” 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하리가 만일 자신을 이리-인간으로 느끼고, 자신이 적대적이고 대립적인 두 개의 본성으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단지 사실을 단순화하는 신화에 불과하다. 하리는 절대 이리-인간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자신이 날조해 믿고 있는 허위를 그냥 받아들이고, 그를 사실상 이중적 존재, 즉 황야의 이리로 간주하고 해명하려 한다면 좀 더 쉽사리 이해하리라는 희망에서 착각을 이용하는 것이다.
하리는 두 가지 본성이 아니라 수백, 수천 가지의 본성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그의 생활은( 모든 인간의 생활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극(極), 이를테면 본능과 정신, 성인과 방탕아 사이에서 흔들거릴 뿐만 아니라 수천 가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양극들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
과거로 되돌아가는 길은 없다. 이리로도 어린이로도 되돌아갈 수는 없다. 모든 사물의 발단에 천진난만성과 단순성이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창조된 것은 모두가 외견상 가장 단순한 것까지도 이미 유죄이고 모순투성이이며, 이미 생성의 더러운 흐름 속에 던져져서 결코 그 흐름을 다시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본래는 원하지 않으면서 지금 옷을 입고 외출해 교수를 방문하고, 적든 많든 거짓으로 점잖은 말들을 주고받는 것처럼, 대개의 사람들도 본래는 원하지 않으면서 매일매일, 매시간 그렇게 행동하고 살아가도록 강제당하고 있으며, 싫으면서도 기계적으로 강제당해 방문도 하고 대화도 하고 관청과 사무실의 근무 시간을 지키기도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기계로도 똑같이 할 수 있을 것이고 안 해도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영원히 지속되는 기계적 운동이 나와는 달리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생활에 대한 비판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의 우둔함과 천박함, 소름이 끼치도록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애매성과 절망적인 비애와 황폐함을 인식하거나 느끼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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